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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성적에도 밥이 넘어가냐

by 오류정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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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성적에도 밥이 넘어가냐? 네 동생은 고1인데도 올 1등급인데. 이제 고3 올라가는 놈이 대학 갈 생각은 있는 거야?”
“신우도 실수만 안 했으면 올 1등급이었어.”
“실수도 실력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너한테 인마 부족한 게 뭐야? 집이 가난해서 등록금 걱정을 해, 밥 세끼 걱정을 해. 따뜻한 집에서, 용돈 받으면서, 학원에 과외에. 그깟 공부하나 제대로 못해. 난 인마,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도 장학금 받으면서 학교 다녔어 인마.”
“그만해요, 여보.”
“로스쿨, 때려치워 인마.”

<소년 심판> 드라마에 나오는 판사 아빠와 엄마의 대화 일부다. 판사인 아빠가 아침 식사 전에 두 아들의 성적표를 훑어보며 위와 같은 말을 내뱉는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게 말이다. 고3 큰 아들 신우 눈에는 눈물이 글썽 맺혀있다. 신우 바로 옆에 바짝 붙어있는 엄마는 안절부절못한다. 신우를 변호해보지만 아빠에게는 먹히기 않는다. 고1 남동생은 신우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아빠의 칭찬에 기분 좋아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밥을 흐뭇하게 먹는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신우가 꼭 나 같았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뭐든 용인되는 그런 가정의 모습에 울컥했다. 밖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판사 일지 모르나 집에 들어오면 판사 옷을 벗고 아빠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인데 극 중 판사 아빠는 그렇지 못했다. 일터에서는 카리스마 있고 정의로우며 시민을 위한 모습으로 비치지만 집에선 폭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두 얼굴의 판사였다.

‘꼭, 저렇게 말을 해야 할까?’ 드라마에 감정이입을 한 까닭은 나도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부모님,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언어폭력을 당한 피해자였다. 부모님의 모든 말은 맞았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고스란히 내가 입었다. 한 때 다른 부모님 밑에서 컸으면 이렇게 크지 않았을 텐데를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덕분에 부모님과의 관계는 나날이 멀어지고 오해는 서로 깊어갔다. 부모를 이해하는 데,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40년 가까이 걸렸다. 반대로 얘기하면 40년을 오해하며 살았단 얘기다.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책을 읽고 스스로 오해를 내려놓았다. 부모님 세대의 사회상을 그린 소설과 역사서를 읽으며 당시 상황을 그려봤다. 또 심리서적을 읽으며 반대 입장이 돼보는 상상을 해봤다. 감사 일기를 2년 넘게 매일 100개씩 쓰기도 했다.

도피처로 선택한 책이었는데, 도피처가 안식처가 되었다. 지금은 부모님과 잘 지낸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가면 수다쟁이가 된다. 아빠가 싫어하는 쓸데없는 말도 많이 한다. 엄마는 쓸데없는 말을 좋아하고 아빠는 여전히 말이 별로 없다. 필요한 것이 있는지 먼저 물어본다. 또 언제는 내가 필요하면 얘기해달라고 한다. 시간이 되는 한 돕겠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마음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대하니, 상대도 서서히 마을을 여는 경험을 실제로 해봤다. 고3 때의 신우에겐, 집이 지옥일 것이다. 집에 매일 들어오기 싫을 것이다. 아빠와 매일 아침 마주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친동생과 비교를 하니, 동생이 얼마나 싫을까. 다음 스토리는 아마 신우가 삐딱하게 다른 길을 걷는 내용이 나올 것이 뻔하다.

저때의 나로 돌아가 신우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신우야 얘기해. 지금 네가 필요한 걸 얘기해. 참지 말고 얘기해. 아빠, 난 인마가 아니라 신우예요. 난 아빠에게 따뜻한 말이 듣고 싶어요. 성적 얘기 말고 요즘 힘든 건 없냐는 그런 말이 듣고 싶다고요.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요, 어릴 적 아빠의 사랑 어린 눈빛이 그립다고요.’ 말 못 하는 아기 일 땐 한없이 예뻐하다가 크면서 부모의 사랑은 변한다. 사랑이 변하는 것일까, 마음이 변하는 것일까. 변하는 이유는 바로 ‘성적’이란 놈 때문일 것이다. 남과의 비교가, 사회가 낳은 비교가 바로 성적일 테니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재 그대로 인정해주는 건 불가능할까. 어쩌면 신우가 듣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일지 모르겠다. ‘신우야, 넌 존재 자체가 내게 행복이고 기쁨이야. 성적에 실망할 필요 없어.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많아.” 조건부 사랑이 아닌 그냥 사랑으로.

부모가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 아이도 부모의 삶에 부응해 살 필요는 없다.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자존감’이 아닐까. 언제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 바로 응원이 아닐까 생각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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