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너하고도 연을 끊어야겠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저 왔어요.’라고 인사한 뒤, 엄마와 얘길 나누는데 아빠가 이리 와서 앉아보라고 했다. 무슨 말이 오갈지 예상이 되는 상황이었다.
“투표했어?”
“아침 먹고 가서 하려고요.”
“몇 번 찍을 꺼고?”
“제가 보기에 좀 더 나은 사람 찍으려고요.”
“니들 자식 세대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우린 살 날이 얼마 없으니까 상관없어.”
“전 제가 보기에 좀 더 나은 사람으로 투표하려고요.”
“이제 너하고도 연을 끊어야겠네.”
“식사하러 오세요.”
식사하러 오라는 엄마의 말에 대화는 끝이 났다. 아침 식사 내내 아빠는 말이 없었다. 엄마와 난 과일 얘기, 반찬 얘기 그리고 아빠가 싫어하는 쓸데없는 얘길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45년간 아빠와 나는 한 번도 정치 견해에 대해 합의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자식과 연을 끊어야겠다는 아빠의 레퍼토리는 투표권이 주어진 뒤로 계속됐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합천이다. 고 전두환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아빠의 동생 삼촌은 군인으로 전역하셨다. 경남 하면 정치 지역색이 어딘지 다들 아실 거라 짐작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얘기해봐야 들으려 하지 않고 나 또한 그랬다. 사람은 믿으려 하면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의심하려 하면 오만 증거를 갖다 되고 믿지 않는 존재니까. 들으려 하지 않는 아빠와 증거를 대는 아들 사이의 거리는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멀어지길 반복했다.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했다. 책과 강연을 찾아 읽고 보고, 때론 대화도 시도했지만 거리를 좁히는 건 불가능했다.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에는 지역 대립 구도를 만든 이야기가 등장한다. 정정당당을 외치지만 계속 낙방하던 후보에게 직함도 없는 킹메이커가 찾아와 대통령에 당선시킨 뒤, 다시 정권을 되찾고 싶은 세력 편으로 들어가 사용한 카드가 바로 '대립' 구도 카드였다. 옳고 그름의 논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논리. 그 프레임이 통하는 2022년 정치 구도가 정확히 영화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자기 목소리 내는 데 겁먹지 않고, 희생을 강요받지 않는 세상. 선거는 쇼인가? 정치인가?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가 오늘 더 인상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 채널에서 정치 생각이 서로 다른 부모 때문에 힘들어하는 고민 상담을 본 적이 있다.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와 자식 간은 의견 차이는 바꿀 수 없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부모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부모님은 나와 생각이 다르구나.’ 하고 지나가라고. 갈등의 원인은 ‘생각’ 때문이라고. 부모는 자식에게 얘기하면 바뀔 거란 ‘생각’ 때문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얘기하는 건 ‘설득이 통할 거란 생각’ 때문이라고. 서로 간에 ‘그럴 수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마음과 양보가 없이는 합의는 불가능하다고.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미움받을 용기, p162)
집에 돌아오니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가 자꾸 뭐라고 투덜대신단다. 엄마는 아빠 앞에서는 ‘알겠습니다.’라고 얘기하고 넘어가라고 했는데, 난 그리 하질 않았다. 아니 싫었다. 앞에서는 ‘네.’라고 하고 뒤에서는 반대로 행동하는 말 바꾸는 선수가 되는 게. 화살이 엄마에게 돌아가 마음이 편칠 않았다.
전화를 끊고 창문 넘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내 마음의 날씨가 반영된 듯 하늘엔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태양이 떠있었다. 투표하고 낮술하고 일찍 자야겠다. 내일 날씨는 어떨까? 자고 일어나면 다른 세상이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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