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교수의 아버지는 6. 25 직후 북한과의 교전상황에서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 유공자였습니다. 이국종 교수는 친구들이 ‘병X의 아들’이라 놀리는 게 두려워 중학교 때까지 아무에게도 아버지가 국가 유공자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늘 가난했습니다. 가끔 술을 마신 아버지는 이국종 교수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아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을 찾았는데 국가 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자 간호사들의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고 몇몇 병원을 돌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 사회가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냉랭하고 비정한 곳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아픈 사람에겐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병원을 전전하던 중 외과의사 이학산 선생님께서 제가 내민 카드를 보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이학산 선생님은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셨습니다. 또한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학산 선생님은 형편이 어려운 분들께 거의 돈을 받지 않고 치료를 해주셨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고 그분과 같은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의대 4년을 마치고 나니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더 이상 의사의 길을 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 학교에 제적 신청을 하고 2주 뒤 해군 갑판병으로 입대했습니다. 상사와 전우들은 이국종 교수가 의사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좋은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분들이 강조한 건 바로 뱃사람의 정신이었습니다.
“뱃사람은 어떤 큰 파도도 헤쳐 나가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소금기와 기름때에 찌든 군복은 값진 것.”
상사와 전우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학업을 계속 이어가길 권유했습니다. 아마 이국종 교수가 해군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의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국종 교수가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들 때 들은 주변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습니다.
사람의 가슴으로 번져와 또렷하게 새겨지는 말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말은 내 안에서 자랍니다. 말에는 사람을 자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이를 자라게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고 따뜻한 말을 나누는 하루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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