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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을 먼저 챙깁니다

by 오류정 202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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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비가 오려나. 여기도 쑤시고 저기도 쑤시고.'

영화나 드라마에 노인께서 이렇게 말하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습니다. 아직은 내 입에선 안 나와 다행이라 여겼고 인정하기 싫어 거부했던 말을 이제 저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살면서 크게 다친 적이 세 번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께 공부한다 도서관 간다 거짓말하곤 치킨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많던 나이였지요. 비가 내린 어느 날, 중앙선에서 불법 유턴하던 택시에 오른쪽 무릎이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택시 앞 범퍼는 부서져 내려앉았고 저는 공중에 붕 날았습니다. 태어나 첫 번째 비행이었습니다.

대학교 방학 기간에는 퀵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 전이었고 지금처럼 배달이 일상이 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가 시급이 2,500원이었고 퀵 서비스는 기본 배송료가 6,000원이던 때였으니까요. 방학기간 큰돈을 벌어 경주용 오토바이를 샀습니다. 요란한 큰 소리도 좋았고, 온몸을 감싸는 육중한 떨림에 반했고, 무엇보다 눈 깜짝할 때 눈앞에 '뿅' 사라지는 스피드에 뿅 갔었습니다. 그렇게 뿅카를 타고 뿅 하고 속초 여행을 떠났습니다. 떠난 새벽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부슬비니 금세 그치겠지 하며 기어를 넣었었죠. 그러다 춘천 국도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습니다. 옆으로 누워 속초를 구경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사진도 시작을 시작했습니다. 취미로 이것저것 찍다 야경에 빠졌습니다. 서울에 모든 다리를 다 담겠다며 퇴근 후 한강을 헤맸습니다. 그날도 비가 내렸고 저녁 8시경에 그쳤습니다. 퇴근하고 집에서 쉬면 좋았으련만 카메라 가방을 들쳐 메고 양화대교로 향했습니다. 비가 내려 깨끗해진 밤하늘에 청아하게 빛나는 양화대교를 상상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습니다. 가뜩이나 몸도 무거운데 카메라 가방까지 더해진 무게에 바퀴는 삐걱삐걱 짜증을 냈습니다. 양화대교 야경 포인트 50미터를 앞에 두고 일이 터졌습니다. 손잡이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잡았는데 갑자기 '턱' 소리가 났습니다. 소리와 함께 턱에 걸려 앞으로 '턱' 재주를 넘었습니다. 턱 말고도 좀 더 묵직한 소리가 났는데 난간에 부딪힌 소리려니 했습니다. 몸이 한강 쪽으로 반쯤 걸려 넘어가 있었고 바퀴는 아까 그 자리에서 얼굴을 구기며 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얼마나 무거웠으면 그랬을까요.

덕분에 병원에 3번을 입원했습니다. 부러지고 부딪히고 찢어진 상처는 몸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사고에서 회복하며 생각했습니다. 이쯤이라 다행이라고, 빨리 회복하는 내 몸에 감탄했고, 부모님의 참을성에 감사했습니다. 멋모르고 아무거나 저지르던 시절이 그리 지나가 마흔 줄에 접어들었더니 이제 몸이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날씨는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어제는 발목이 아침부터 뭉근하게 아팠습니다. 발목을 좌로 우로 돌리고 계단 난간에 서서 스트레칭하고 발목 마사지를 해도 아픔이 계속됐습니다. '비가 오려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약간 흐릴 뿐, 비가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날씨 예보에도 비 소식은 없었고요. 오전에 외출해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비구름을 몰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집에 도착 전까진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 오피스텔 1층에 내려간 뒤에야 밤새 비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오피스텔 1층 현관문에 빗방울이 한가득 맺혔고 바닥 타일에는 모래가 사방으로 튀어있음을 보며 간밤에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음을 알았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제게 속삭입니다. 오늘은 더욱 조심하라고.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재촉한다고 서둘러 오지 않을 텐데,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더해진 봄비려니 생각합니다. 비가 오는 날은 몸을 챙기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챙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좀 더 편하게 좀 더 소중하게 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알아서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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