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아껴 써야 한디, 니가 날려먹은 돈이 아파트 몇 채는 될끼다. 니도 알제?"
돈 얘기만 나오면 엄마는 꼭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그렇게 많이 날려먹었었나 잠깐 생각 하지만 난 금세 잊고 화두를 다른 데로 돌린다.
나는 돈 개념이 없다. 평생 없을 것 같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빚을 내서 썼다. 대학교 때 용돈이 부족하면 엄마에게 프로그램 사야 한다며 거짓말을 하고 돈을 타서 애들과 술을 마셨다. 과 친구들은 나를 무척 따랐다. 내가 매일 술을 샀기 때문이다. '오빠, 오늘은 뭐 먹어요.' 하면 '우리 00 먹고 싶은 거 먹자.'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인데 그때는 그게 멋인 줄 알았다. 미친 짓은 단번에 끝나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돈으로 여자를 살 수 있는 곳을 우연히 따라갔다. 그곳은 신세계였다. 아니 천국이라고 해야 맞는 건가. 예쁜 사람들이 버스로 한가득이었다. 돈 많아 보이는 사람도 넘쳤다. 나는 돈이 많아 보이고 싶었다. 마약처럼 중독되듯 꾸준히 신세계를 찾아다닌 덕분에 월급은 통장을 스쳐 지나갔다. 카드론이란 걸 알게 됐다. 대출은 쉬웠다. 탄탄한 직장 덕분에 한도도 넉넉했다. 3분이면 통장에 돈이 두둑해졌다. 이자는 생각 안 하고 샤워하듯 돈을 빌려 썼다.
돈을 물처럼 썼지만 그나마 잘한 일이 하나 있었다. 월급 통장을 엄마에게 맡긴 것. 내 수중에 돈이 있으면 흥청망청 써버렸기 때문이다. 엄마는 월급을 꼬박 꼬박 저축을 했고 어느 비 오는 날 숭인동 판자촌으로 나를 이끌었다. 낯선 사람이 서류를 내밀며 사인하라기에 했는데 5년 뒤에 판자촌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들어보면 알만한 브랜드, 힐스테이트였다. 부동산에 들어가 현재 시세가 얼마나 하는지 물었다. 듣고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다. 이래서 부동산 부동산 하나보다 했다. 은행에 가서 담보 대출을 신청했다. 승인까지 1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상관없다고 했다. 1주일 뒤 승인이 났고 대출금은 통장에 입금됐다. 입금되자마자 당당히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고, 빚을 청산했다.
다시는 돈 빌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다짐은 다짐으로 끝났다. 또 돈을 빌렸다. 왜 이런 습관이 생겨버린 걸까. 원망도 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힐스테이트는 다니던 버젓한 회사를 내 손으로 그만두며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파트를 팔고 빚을 청산하니 5평 오피스텔이 하나 남았다. 처음 오피스텔에 가보니 실망만 늘었다. 힐스테이트는 방 3칸에 거실도 있었는데 여긴 덜렁 방만 있다. 월세를 놨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내 마음대로 사표쓰고 나오니 나를 써줄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나에겐 퇴직금으로 받은 여분의 돈과 오피스텔과 카메라가 남았다. 개인 사업자를 냈다. 개인 사업차 1년 연봉으로 30만 원을 벌었다. 엄마는 내게 얘기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라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1년만 더 해보겠다고. 2차 연봉은 300만 원을 벌었다. 뿌듯했다. 엄마는 또 내게 말했다. 회사로 들어가라고. 나는 버텼다. 버티는 데도 한계는 찾아왔다. 우연히 친구가 만든 회사에 들어가 4년간 잠시 몸을 담그고 다시 나왔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단 걸 깨닫는데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빨이 한 두 개 빠졌고, 몸에 여러 상처가 생기고 머리카락이 한올 두올 희끗해지니 알겠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고 하는 게 맞겠다. 2021년 2월 20일 토요일 오전 11시 34분,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다가 문뜩 이 생각이 스쳤다. 사회생활을 허투루 하고 남의 말 잘 안 듣고 내 맘대로 사는 인생의 모습은 어떨까? 비참할까?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 회사에서 또 나왔고 집에서 독립했다. 하루 수입은 3만 원이다. 일주일에 5일 일한다. 일하는 시간을 다 합치면 10분. 일이라기보다는 아르바이트라고 하는 게 맞겠다.
하루에 3만원 벌면 1만 원은 식비로 쓰고 2만 원은 투자한다. 어떻게 이런 생활이 가능하냐고 의문이 생길지 모르지만 가능하다. 책을 읽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빚이 없다. 신용 카드를 다 잘라버렸고 다이어트하면서 적게 먹고 8시간 잠을 잔다. 시간이 남아돈다. 남는 시간엔 멍 때리거나 산책을 다니거나 책을 읽는다. 10년 전 우연히 만난 책 덕분이다. 그때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내 삶은 어땠을까? 상상도 안되지만 상상하기도 싫다.
부는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나는 지금 부자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중 가장 값진 시간,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가진 부자. 하고 싶은 걸 하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조금씩 나누며 산다. 삶은 참 재밌다. 흥미진진하다. 10년 전 만난 책 한 권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책 덕분이다. 이제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겠다.
나는 지금 재밌게 산다. 인생은 참 비트 코인 같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는 법이 없다.
(될일은 된다, P14)
'오류 찾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책을 선별하는 기준 (1) | 2021.02.20 |
---|---|
쓰레기 옆엔 쓰레기가 쌓인다 (2) | 2021.02.20 |
인간 관계 상호성의 원칙, Give and Take (0) | 2021.02.20 |
책 잘 고르는 법 (0) | 2021.02.20 |
인생이란 '어쩌다'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것 같다 (2) | 2021.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