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헌님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책 고르는데 고민이 많아서 이렇게 개인 톡 드리게 되었네요.'
독서 모임 학인에게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학인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학인은 자신에게 책 태기가 온 것 같다며 요즘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야길 시작했다. 또한 매주 책을 읽고 있기는 한데 기존에 사놓은 책들엔 손이 안 가고 그렇다고 딱히 새로운 분야나 책에 흥미가 없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반가웠다. 나 또한 과거에 학인과 같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기계적으로 책을 읽었지만 뭔가 계속 제자리 걸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책에 흥미가 점점 떨어지고 있던 때였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는 바로 그 책 권태기였다. 책 태기는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해결 방법은 한 가지다. 의무적으로 읽는 것을 관두고 재밌는 책을 읽는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으뜸으로 치는 요즘 시대에 그것과는 반대로 시간을 허투로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다. 유익을 캐내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무익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다. 순수한 유희와 쾌락을 즐기기 위해 읽는 잉여의 책 읽기가 책 태기를 해결하는 열쇠다. 쓸모 없어짐으로 자신의 쓸모를 드러내는 책 읽기야 말로 독서의 최고봉이라 생각한다.
문장 대비 건질 게 없다는 이유로 자기 계발서와 철학책만 주야장천 읽다가 독서 번아웃이 왔다. 그때 소설을 짚어 들었다. 정유정, 이기호, 장류진 작가를 만났다. 한국어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장강명, 이경, 박민규도 만났다. 책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때론 웃고, 때론 울고, 때론 흥분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정이 요동쳤다. 살아있는 문자란 이런 것임을 소설이 내게 알려주었다.
소설을 읽기 전 “남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이야기를 도대체 왜 읽는 건가요?”라고 묻던 사람이 나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바삐 살기도 바쁜데, 실제 있지도 않은 가상의 인물 이야기를 시간 낭비하면서 왜 들여다보고 있느냐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렇게 시간이 많으면 ‘내 삶’에 쏟는 게 낫지 않겠냐는 소리일 테다.
소설을 읽으며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소설을 읽는 사람은 누구보다 ‘내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설 애호가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읽는 사람이다. 나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있는데 자꾸 내 삶이 들춰지는 것 같아서, 소설가가 내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는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인물들이 펼쳐 놓은 다양한 삶을 통해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저렇게도 살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
책의 여러 종류 중 문학장르를 대표하는 소설은 언어로 이루어진 상상의 집이다. 이 집에선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만나게 되고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간접 경험하게 되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된다.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결국 다른 이들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함이다.
책 태기가 왔다면, 소설 읽기를 권한다. 여태 유용을 캐내던 독서에 지쳤다면 더더욱 소설 읽기를 권한다. 잃어버렸던 읽기의 재미를 다시 찾게 해 주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해주는 무용의 독서가 사실은 진정한 독서임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꼭 소설이 아니어도 괜찮다. 만화책도 좋고 빵빵 터지는 에세이도 좋다.
최근 혼자 큭큭 대며 읽었던 <<더블>>,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를 학인에게 추천했다. 학인이 다시 독서의 재미를 찾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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