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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센터에서 배운 거절의 기술

by 오류정 2022. 8. 27.

"8월에 받으시는 게 12월에 받으시는 것보다 시간도 단축되고 좋아요. 8월엔 휴가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12월보다 대기 시간도 적게 걸리기도 하고요."

한국 건강관리 협회에서 전화가 걸려온 건 월요일 오후였다. 올 들어 세 번째 전화다. 2022년 건강 검진 대상자에 포함되어 12월 31일까지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연말을 피해 한가로운 8월에 미리 받는 건 어떠냐는 취지의 전화였다. 두 번째 전화까진 거절했다. 세 번째 전화에 설득당했다. 8월 26일 금요일로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금요일 오전 7시 40분 건강검진 센터를 방문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접수 창고에 20명쯤 보였다. 8시부터 시작이니 조금 기다리는 건 감수해야지 생각했다. 접수를 마치고 9층에서 환복 후 다시 6층에 도착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리고 6층에 도착해 대기 인원을 본 뒤에야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속았다. 9층에서 6층까지 계단을 내려온 뒤 처음 마주한 광경은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안내를 하는 직원만 5명이었고 은행 창구를 방불케 하는 접수 인원은 자그마치 14명이었다. 상담원에게 설득당했지만 건강검진 날짜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당한 것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접수 차트를 안내 직원께 넘기며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3시간도 넘게 걸릴 것만 같았다. 다른 날 다시 올까, 그냥 온 김에 받고 갈까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20년 전 306 보충대 앞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 떼쓰던 때가 떠올랐다.

21살 크리스마스 3일 전 입영 영장을 전달받았다. 엄마는 술 취해 들어온 아들에게 무심히 영장을 건넸다. 난 연기할 거라고 무심히 답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했던가. 뜻밖의 예상치 못한 공격이 나에게 들어왔다. 입영 1997년 12월 22일 당일 새벽 4시 30분에 삼촌이 내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것이다. 나를 군대에 집어넣었기 위해 친히 방문까지 하셨다. 잠결에 끌려 나왔고 지프차에서 다시 잠들었고 306 보충대 앞에 도착해서야 현실을 실감했다. 삼촌은 3만 원을 건네며 아침 먹고 들어가라고 했다.

"정석헌 님."

306 보충대 장면을 떠올리느라 내 이름을 호명하는 것도 몰랐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세 번 호명된 뒤에야 접수 차트를 받아 들고 안내원이 안내하는 결재 창고로 향했다. 차트에는 대기 번호 1076번이라는 번호표가 붙어 있었고 현재 접수는 1069번이 진행 중이었다.

보충대 앞 어느 가든의 소불고기 가격은 2만 원이었다. 삼촌이 3만 원을 건넸으니 1만 원이 남는 셈이다. 1만 원으로 새벽에 끌려와서 뭘 할 수 있을까. 입영 통지서에 입소 시간은 오전 8시로 적혀 있었고 가든 벽에 붙어있는 시간은 아침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밥을 한술도 뜨지 못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부모님께 속았고 삼촌에게 속았다는 생각만 했고 속에선 열불이 났다.

2만 원 상을 그대로 놓고 계산대로 향했다. 현금 2만 원을 식당 주인에게 건면서 남은 1만 원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집으로 가야지 했다. 계산대에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께 전화 한 통을 부탁했고 집으로 전활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쯤 들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난 다짜고짜 집으로 갈 거라고 말하려고 했다.

"엄마, 나 다시.."
"석헌아 잘 갔다 와."

전활 끊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목이 메었다. 그리고 그 길로 입대했다. 아침밥은 못 먹은 상태였고 배가 고팠다.

딱 그 심정으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위 검진 센터 앞에 앉아 있는데 왼편에 나처럼 속아서 온 아주머니 한 분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봤다. 대기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계속 서서 센터 앞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셨다. 아주머니께서는 어떤 결정을 하셨는지 검진 센터 직원에게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하셨다. 직원은 들은 뒤 딱 잘라서 이렇게 말했다.

"앞에 대기 2분 계신데, 지금 취소하시면 취소하는 시간이 더 걸려요."

진짜일까. 가짜일까. 직원분의 목소리는 306 보충대 앞에서 들었던 엄마 목소리처럼 단호하면서 어떤 힘이 느껴졌다. 어디서 이런 멘트를 배우셨을까. 지금 취소하면 취소 시간이 더 걸린다니. 들으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다. 시스템에 접속해 클릭 몇 번이면 취소가 될 텐데. 이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취소하려면 3곳에서 취소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위 검진 센터 취소, 접수처 취소, 마지막으로 건강검진 공단의 취소.

설득은 성공했다. 아주머니는 마음을 돌린 듯 대기석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직원은 한 번 더 물었다. 그래도 취소해드릴까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좌로 우로 흔드셨다.
역시 거절은 단호하게 해야 한다. 어떤 여운이라도 남기면 안 된다. 위암 검진 센터 직원분을 보면서 다시 배웠다. 직원분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터득한 기술일까. 만약 나라면 아주머니께 어떻게 멘트를 했을까.

"정석헌 님."

설득당하지 않는 방법은 한 가지다. 건강검진센터 직원처럼 단호하게 거절하면 된다.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설득당하게 된다. 단호박이 되지 못하면 오늘 나처럼 선택당한 게 된다.

검진을 마치고 1층에 내려온 시간은 11시 20분이었다. 몸에 바늘구멍이 세 개 생겼고 3시간 40분을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고 내 이름을 30번쯤 들었다. 내년엔 상담원의 전화를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을까. 건강검진센터를 걸어서 나왔다. 1층 자동문이 열리며 가을바람이 나를 반겼다. 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내년엔 단호박 같은 사람이 되야겠고 지금은 달달한 커피부터 먹어야겠다.